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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1)

by ㎣㎤㎥㎦ 2022.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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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전세 방식은 농토의 비옥도와 그해 풍흉에 따라 부세를 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매우 복잡하였고 농민들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정은 15세기 말부터 풍흉과 관계없이 1결당 4~6두를 징수하였습니다. 그리고 16세기 이후로는 세액이 최저율로 적용되었습니다. 이후 조정은 1635년부터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미곡 4~6두씩 전세를 납부하는 영정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조선 전기 농민들의 조세 부담 중에서 지역의 특산물을 납입하는 공납이 가장 무거웠습니다. 특히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특산품까지 부과되면서 농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방납을 시행하였으나 오히려 농민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이이와 유성룡은 특산물 대신 가호를 기준으로 하여 미곡으로 수납하자는 수미법을 제안하였습니다. 이후 유성룡은 전결 수에 따라 미곡을 균등하게 부과하자고 하였으나 이러한 건의들은 정책적으로 결실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광해군 대에 이르러 조정은 공납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동법을 마련하였습니다. 대동법은 수미법과 비슷하게 특산품을 대신하여 미곡으로 세를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대동법은 세액의 기준을 농지의 결수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부담은 투지 소유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대동법은 세액의 기준을 농지의 결수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부담은 토지 소유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로 따라 대동법의 시행은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완강한 저항을 받았고, 전국적으로 확대될 때까지 100년이 걸렸습니다.

대동법은 일시적으로나마 공납의 문제점을 해결하였지만 문제가 아주 해결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왕실에 진상품을 헌납하는 별공이 남아 있었고, 지방 관청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특산물을 징수하였습니다. 게다가 토지 소유자가 자신에게 부과된 대동세를 소작농에게 전가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중앙으로 가는 세수는 증가하였지만 지방 재정을 담당하는 세수는 갈수록 줄어들었습니다. 이는 지방 재정의 운영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농업 기술의 변화와 발달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자 농업 경영 방식이 변화하였습니다. 농민들은 경작지를 늘려서 더 넓은 토지를 경작하고자 하였는데, 이를 광작이라고 한다. 지주들은 소작보다 직접 경영을 선호하였고, 일부 능력 있는 농민들은 광작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도시 주변에서는 목화, 담배, 채소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높은 수익을 올렸습니다.

이러한 광작과 상품 작물의 재배로 인해 부유한 농민층이 형성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를 축적하지 못한 대부분의 농민은 토지를 잃고 도시의 임금노동자가 되거나 영세 상인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농민들 간의 경제적 격차는 커졌고, 이는 결국 농민 계층의 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 후기 신분제가 동요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편, 농업 경영의 변화 양상은 소작제도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수공업 분야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조선 전기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공장들은 16세기 이후 점점 줄어들었고, 국가는 공장이 부족해지자 민영 수공업자들을 고용하였습니다. 민영 수공업자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점차 이익을 얻기 위한 상품을 생산하였습니다.

조선 초기 광업은 국가 주도하에 부역제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역제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심하였고, 부역제가 점점 해이해지자 국가의 광산 개발과 통제는 힘을 잃어갔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고 원료인 광산물에 대한 인기가 급증하자 민간에서는 광산 개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정은 민간인들의 광산 경영을 허가하고, 호조에서 별장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는 설점수세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여기에 상인들도 광산 개발에 참여하면서 광산개발은 활기를 띠었습니다. 그러나 별장의 파견으로 호조가 수세를 독점하였고, 지방의 감영이나 군인들이 각종 세금을 부과하자 광산 수는 격감하였습니다. 또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서 잠채가 성행하였습니다.

농업 생산력이 향상하고 수공업이 발달하자 이를 판매하는 상인의 존재도 요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대동법 실시 이후 등장하는 공인과 사상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공인은 관을 배경으로 하여 상권을 독점하였고, 이를 통해 독점적 상인인 도고로 성장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로 인해 장시의 전국적 확대도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전국의 장시를 오가며 상행위를 하는 보부상의 활동도 활발하였습니다. 장시는 보통 5일 간격으로 열렸지만 일부는 상설장이 들어서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장시는 교역 외에도 민중들이 문화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하던 장소였습니다.

유통망이 확보되고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결제 수단인 화폐의 사용이 확산하였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상평통보를 이용하여 세금을 내고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자,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습니다. 그러나 화폐가 점차 재산의 축적이나 고리대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시장에서 월활하게 유통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전황이라고 하였습니다.

국내 상업이 발달하자 국제 무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청과의 무역은 공식적으로 허용된 개시와 사적으로 행해지는 후시가 이루어졌습니다. 상인들은 주로 사신들이 왕래할 떄 함께 오가며 무역 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은 은, 종이, 인삼, 무명 등을 청으로 수출하였고,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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